[경상시론]‘잔인’하지 않은 4월, 문화예술 발전의 불씨를 살릴 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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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잔인’하지 않은 4월, 문화예술 발전의 불씨를 살릴 적기
  • 경상일보
  • 승인 2023.04.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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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영국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이 101년 전에 발표한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에서 이렇게 말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었다 /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 먹여 살려 주었다.



그는 왜, 많은 봄꽃이 피어나고 생명력이 약동하는 아름다운 4월을 비관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는가. 이는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어버린 서구인들의 황폐하고 피폐해진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 3년간은 지루하고 처절했으며 우여곡절이 많았던 팬데믹과의 싸움이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난관을 이겨내고 대면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에 발맞춰 울산지역 문화예술계는 기지개를 켜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울산연극제를 필두로 여러 공연과 전시회, 강연 등을 개최함으로써 시민들의 정서적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여건이 형성되고 있다.

시인 박목월은 ‘4월의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중략)/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6.25가 끝나가던 시절,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임에도 4월에 대한 낭만적 인식을 당대 최고의 시인답게 잘 표현하고 있다.

이상기온으로 개화 시기가 앞당겨지기는 하였지만 지금 제철 맞은 봄꽃들이 한창이다. 전국적으로도 철쭉제, 청보리 축제, 튤립 축제, 꽃박람회 등 다양하고 풍성한 꽃의 잔치가 열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4월의 대지는 풍요한 향연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곧 절기상 곡우(穀雨)가 다가온다. 이때는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하고 벼 못자리를 내는 등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곡우 이전 며칠 동안에 수확하는 어린 찻잎으로는 신선한 풀향이 짙고 감칠맛이 감도는 부드러운 녹차, 우전(雨前)을 만든다.

4월은 이처럼 생명이 발아(發芽)하는, 건강하고 싱싱한 희망의 달이기도 하다.

필자가 속한 울산문인협회에서는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4월17일부터 4주간 시, 소설, 수필, 시조, 동시 등 문학 장르를 강의하는 ‘제20회 시민문예대학’이 운영되고 있다. 많은 예비 문인들이 창작의 갈증을 풀고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들이 출발점에서부터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함으로써 울산문학은 물론 한국문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는 문인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신동엽 시인은 그의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갈파한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중략)/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런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세상의 부조리나 겉치레와 같은 허위는 사라지고 진정 순수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오기를 희구하는 시인의 어조가 강렬하다.

문화예술의 발전을 바라는 이 지역 예술인들과 그것을 향유하는 시민들의 풍성한 마음이 어우러지는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희망의 달’이다.

건조한 날씨에 잦은 산불의 불씨는 제거하고, 건조한 시대에 문화의 불씨는 살림으로써 시민들의 팍팍한 마음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권영해 시인·울산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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