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부산에서 발행되는 국제신문을 봤다. 한 칼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칼럼의 제목은 ‘부산이 서울에게’였다. 궁금증 유발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칼럼의 필자는 국제신문 권혁범 경제부장. 첫 문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자꾸 이거 달라, 저거 좀 나누자 그래서 면목 없다’라고 적었다. 무슨 주장을 펼치려는지 점점 글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개를 끄덕이게 했고, 무릎을 ‘탁’ 치도록 만들었다. 글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필자(筆者)가 볼 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간만에 지역의 목소리를 제대로 설파한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어느 날,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느닷없이 온 지역소멸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은 시기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용기와 강단이 필요한 주장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는 줄 게 없다’라는 두 번째 문장이 정곡을 찔렀다. 대한민국 문제의 처음과 끝은 서울공화국이라는 것을 실감케 하는 칼럼이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구닥다리 속담이 우주에 정거장을 짓고, 초연결시대에 오히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가 21세기에 펼쳐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권 부장은 이 칼럼에서 인구 유출과 감소, 기업 유치의 어려움, 효과 없는 수도권 규제, 출산·육아·교육·문화·의료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부산의 현실을 꼬집었다. 부산 이야기지만, 부산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다. 울산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부산보다 낫다면 세계적인 산업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업이 많다는 정도이다. 그것 빼고 나면 그래도 제2의 도시인 부산보다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필자가 2018년 시의원 당선전까지 10여년 몸 담았던 현대중공업만 봐도 지주사를 설립해 본사를 서울에 두고, 연구개발센터는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등 단순 생산기지로 전락하고 있다. 생산기지 전락은 언제든 인건비 등이 싼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울산으로선 위기의 신호인 셈이다.
권 부장이 이 칼럼을 쓰게 된 이유는 미루어 짐작건대, 산업은행 부산 이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이 여러 가지 암초에 걸리면서 지지부진한 것을 애향심을 곁들여 질타하고 싶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지역에 기반한 정파적 칼럼이라고 해도 새겨들을 말이 많다. 울산이 꼭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 할 이야기도 담겼다. 산업은행 이전에 방점을 둔 글이지만, 울산도 ‘공공기관이전 시즌2’를 차근차근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서울공화국이 대한민국 문제의 끝판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고, 그 문제를 푸는 것이 대한민국이 균형감 있게 발전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공공기관 추가 이전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올해로 7년째 맞는 울산 혁신도시는 기존 이전 기관에 더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노동, 산업안전, 에너지 등을 추가로 유치해야 한다. 그래야 중구의 혁신도시도 살고, 울산도 지역소멸이라는 큰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기존 혁신도시 이외 또 다른 지역에 혁신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논쟁은 접어두어야 한다. ‘뭣이 중헌디’라는 영화 대사를 곱씹어볼 시점이다. 과잉의 비대증에 빠진 서울공화국과 결핍의 왜소증에 걸린 지역이 지금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면 대한민국은 끝내 파국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권 부장이 칼럼에서 제기한 전기요금 차등제도 울산으로선 반드시 관철해내야 한다. 원전의 안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원전 도시 울산이 서울공화국을 대신하여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원전으로 발생하는 전기이익의 얼마 되지도 않은 지원금을 주고 생색내는 데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은 부산이나 울산이나 같은 마음이다. 필자는 2년 전, 이건희 기증관이 유치전 끝에 서울에 들어선다는 결정을 보고 ‘또 서울인가?’라는 칼럼을 써서 서울공화국을 직격한 바 있다. ‘부산이 서울에게’라는 칼럼을 읽고 바뀌지 않은, 아니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는 균형발전에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공해와 오염의 흑역사를 안고 대한민국을 경제강국으로 이끈 울산도 서울에게 할 말은 넘친다.
김종섭 울산시의회 행정자치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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