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주택 전세 사기
상태바
[경상시론]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주택 전세 사기
  • 경상일보
  • 승인 2023.05.12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준희 미국변호사

나라나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서 문화적 특성을 드러내는 뚜렷한 표지는 대개 의식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공감과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닌 현실에서, 그 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한복과 김치가 한국의 것임을 알아보는 건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도 이제는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같은 맥락에서 주거가 드러내는 한국의 문화적 특성은 무엇일까. 물성적 측면에서라면 아마도 한옥이나 온돌이 될 것 같은데, 이를 좀 더 깊이 들어가 제도적 측면에서 주거와 관련한 우리나라 고유의 표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주택 전세라 말할 수 있겠다. 주택 전세가 얼마나 독특한 제도인지는 이에 대응하는 마땅한 영어 단어가 없어서 발음 그대로 ‘jeonse’라고 표기한다는 것과, 집값 중 상당액에 육박하는 거액을 무이자로 임대인에게 빌려주고, 대신 임차인은 별도 차임 지급 없이 목적물인 주택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가, 만기에 일시 상환하는 이 제도를 설명할 때마다 크게 놀라는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타 문화권에서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주택 전세 제도가 최근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주택 전세가 널리 사용되게 된 근·현대사적 배경은 별론으로 하고, 최근 피해가 빈발하고 있는 주택 전세 사기 문제는 제도 자체에 구조적으로 내재한 거래 위험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서 이후로도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더 염려된다. 주택 전세 거래에 있어 당사자들의 목적은 계약기간 중 차임 상당의 이익과 주거목적으로의 사용을 누리는 데 있다 할 것인데, 이를 위해 임대인이 노출되는 거래 위험은 미미한 반면, 많은 경우에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 반환과 관련해 임차인이 감수해야 하는 거래 위험은 젊은 피해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최근의 많은 사건들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명백하게 현실화되고 있다. 서울 강서구와 인천 미추홀구처럼 이른바 갭 투자 거래와 전세 사기 피해 건수가 밀집되어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울산 역시 지난 4월19일자 경상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것처럼 관련 피해 사례와 이로 인해 생계의 위험에 내몰린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임차인 보호를 위해 1981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최근 급증한 관련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입법이 계속해 논의되고 있으나, 주택 관련 거래에 있어 여전히 비중이 높은 현실과 서민 주거안정을 이유로 그 거래에 연관되는 금융기관들의 관련 대출상품, 여기에 임차인 보호를 특정 정당의 정치 편향이라 냉소하며 사금융을 레버리지 삼아 시세차익을 노리는 갭 투자가 여전히 노골적으로 횡행하는 현상까지 뒤엉켜 있어, 궁극적인 해결 방법으로 제시되는 전세 제도의 폐지와 월세 제도로의 완전한 전환은 그 실현을 가늠하기 어렵다.

제목에서 인용한 ‘명백’ ‘현존’ ‘위험’의 원칙은 표현의 자유를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 미국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준으로 1919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홈즈(Holmes) 대법관이 쉥크(Schenck v. U.S.) 판결을 통해 형성한 법리이다. 언론 등은 법이 방지하고자 한 해악이 발생할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을 때에 한해 제한할 수 있는 것이며, 단순히 장래에 그러한 해악을 발생시킬 염려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택 전세 사기에 대한 공적 개입을 거래 자유와 재산권 행사의 제한이라 보는 낭만적인 주장이 있어 이를 반박한다. 생존의 전제가 되는 거주지와 최후의 실질 재산을 지키는 사실상 유일한 법적 수단인 대항력이 임대인의 해의(害意)만으로 단숨에 무력화될 수 있는 지금의 위태로운 현실은 비록 보호되는 기본권은 상이하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포섭되기에 부족하지 않으며, 가사 관련 규제와 제도 보완이 갭 투자의 자유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헌법 질서에 반한다 할 수 없다. 주택 전세 사기는 개인의 부주의와 무지로 인한 사적 불행이 아니라 그 효용이 한계에 이른 전세 제도가 울리는 맹렬한 경고음으로 들어야 한다. 금융기관의 관련 대출 심사강화와 같은 대증적 방법과 함께 제도적 전환에 대한 사회적 협의가 미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준희 미국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도시철도 1호선, 정차역 총 15개 조성
  • ‘녹슬고 벗겨진’ 대왕암 출렁다리 이용객 가슴 철렁
  • 울산 동구 주민도 잘 모르는 이 비경…울산시민 모두가 즐기게 만든다
  • [창간35주년/울산, 또 한번 대한민국 산업부흥 이끈다]3년뒤 가동 年900억 생산효과…울산 미래먹거리 책임질 열쇠
  • 제2의 여수 밤바다 노렸는데…‘장생포차’ 흐지부지
  • [울산 핫플‘여기 어때’](5)태화강 국가정원 - 6천만송이 꽃·테마정원 갖춘 힐링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