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多事多感(15)]살뜰한 봄 약속 하나 남기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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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多事多感(15)]살뜰한 봄 약속 하나 남기지 못하고
  • 경상일보
  • 승인 2024.04.0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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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4월입니다, 그대. 기상 전문 IT 기업인 ‘웨더아이’가 제공하는 ‘벚꽃 개화 지도’를 보면 이 4월 벚꽃은 북상하며 지금도 피고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서귀포를 시작으로 이달 3일께 서울에 상륙하는 벚꽃은 7일께 인천, 춘천까지 개화 소식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한반도의 남쪽만 두고 보면 보름 사이에 벚꽃이 핍니다. 그것이 벚꽃의 속도이며,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벚나무의 걸음걸이입니다. 저는 그 속도를 4월의 속도라고 생각합니다.

봄에 꽃 피우는 나무들을 보면 다들 해동갑하고 바삐 북상 중입니다. 꽃나무들이 꽃 피우기 위해 한반도를 따라 이미 3월부터 다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비유는 ‘데드 메타포’가 된 지 오래입니다. 4월이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는 잔인한 달이 되기에는 우리의 최고 기온이 너무 높아져 버렸습니다. 그건 봄이 추위에 가로막혀 더디 오던 시기에 유효한 은유일 뿐입니다.

벚꽃은 볕의 선물입니다. 2월부터 시작되는 따뜻한 볕이 벚꽃을 키우고 만듭니다. 일본에서 시작된 조사이지만 ‘600℃ 벚꽃 개화의 법칙’이 있습니다. 2월1일부터 하루 기온 중에서 최고 기온을 더해 600℃를 넘어가면 벚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래서 2월이 3월을 만들고, 3월이 4월을 만듭니다. 어제 없는 오늘이 없듯이, 이 4월은 3월이 빚은 눈부신 계절입니다.

4월에 닿기 위해 지난해 동지부터 일출은 하루에 1, 2분씩 빨라졌습니다. 또 일몰은 하루에 1, 2분씩 늦어졌습니다. 그렇게 햇볕을 받는, 일조량을 늘려가며 꽃을 피우고 꽃 문을 열었습니다. 꽃이 꽃 문을 여는 일은 위대한 일입니다. 특히 꽃 문을 여는 일은 꽃의 비밀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앞에서 어찌 설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경고’ 중입니다.

그대. 4월입니다. 4월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의 ‘프로파간다’(PROPAGANDA)였습니다. 마산의 3·15 의거를 지나 4·19 혁명에 닿은 1960년의 봄은 위대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새롭게 태어나던 사람의 봄이었습니다. 신동엽(1930~1969)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고, ‘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습니다.

시인이 남기를 바랐던 흙가슴은 바로 ‘땅’이고 ‘대지’였습니다. 문제는 시인이 바라던 우리들의 대지는 너무 황폐해져 있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많아, 누구도 돌보지 않아 버려져 폐허가 된 땅을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4월이 그런 시간입니다. 4월이 오기 전에 누가 씨를 뿌리고 4월을 보내고 오뉴월에 사람의 건강한 밥상을 거두겠습니까.

현재 우리나라는 저출산 인구소멸 세계 1위의 국가로 변했습니다. 봄이 와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깜깜한 미래에 ‘국가파산’이 예고된 현실에서 아직 봄이 오지 않았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걸린 이 저주를 풀고 막힌 봄을 다시 오게 할 수 있을 것인지요. 정답이든 해답이든 아무것도 없는 문제 앞에 지금 대한민국은, 우리는 어느 계절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몇 시입니까?

벌써 무더워지는 4월에 반팔, 반바지를 입고 싶은 유혹에 무슨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기상학자들은 4월에 ‘기록적인 고온이 찾아올 수 있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4월과 5월에 여름으로 직행하는 날씨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는 희망을 잃은 채 쩔쩔 끓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철선(鐵船)입니다. 오는지 가는지를 모르는 정처 없는 빈 배 신세입니다. 사실 봄은 이미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젠다’(AGENDA)가 없는 봄은 다람쥐가 돌리는 쳇바퀴입니다. 활주로를 찾지 못한 비행기고, 항구를 찾지 못한 빈 선박입니다. 겨우내 언 강물이 풀리고 임이 탄 배를 기다리던 봄이 다시 찾아오길 기다립니다. 임이 오지 않으면 편지라도 오겠지라고 노래하던 봄이 그립습니다. 그리하여 죽어있는 것을 살리는 진실한 봄이 그립습니다. 그대, 4월입니다. 알고 보니 이 봄이 잔인한 4월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살뜰한 봄 약속’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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