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공존을 위해 기억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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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공존을 위해 기억을 선택해야 한다
  • 경상일보
  • 승인 2024.04.2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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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 천상고등학교 교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봤을 문장이지만, 4월은 왜 잔인한 것인지, 이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구절은 노벨상을 받은 시인 토마스 엘리엇의 433행 장편 시 ‘황무지’의 첫 행으로, 1차 세계대전 후 정신적 황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모더니즘 작품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4월을 가장 잔인한 달로 설명하고, 그 이유를 뒤에 설명하고 있다. 거친 땅 황무지에서 봄비는 활기 없는 뿌리를 깨워 ‘라일락’이라는 생명을 피워야 하므로 잔인하다는 것이다.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일깨워야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으리라. 빛나는 태양과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생명이 소생하는 ‘찬란한 4월’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재생을 요구함으로써 더욱 ‘잔인한 4월’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의 4월도 가장 잔인한 달일 것이다. 2014년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못한 참혹한 4월이지만, 찬란한 4월은 다시 돌아와 매년 수많은 학생이 수학여행과 소풍(현장 체험)을 떠나는 설레는 달이기에 그 찬란한 만큼 잔인하다. 세월호 사건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24년 4월16일 9시30분.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천상고등학교 중정을 둘러싼 모든 교실에 300여 개의 하모니카 소리가 10분간 울려 퍼졌다. 음악 교사(윤소희)와 천상고 2학년 전체 학생들이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아 준비한 곡 ‘섬집아기’를 세월호가 마지막 침몰하던 그 시간 연주했다. 이들이 7살 때 발생한 참사이다. 학생들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참사의 아픔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신 ‘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해야 한다.

참사를 추모하는 이 행사가 행여 이벤트로 느껴질까 우려했으나, 10년 전 단원고 학생들과 동갑내기인 학생들은 음악 선생님의 피아노에 맞춰 한음 한음 하모니카를 불었고, 선후배들과 교직원들은 누구 하나 박수조차 치지 못할 정도로 그날의 아픔을 되새겼다.

‘개인은 살기 위해 망각을 선택할 수 있지만, 공동체는 공존을 위해 기억을 선택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글에서 읽었던 문장이다. 더 이상 우리에게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 되지 않기 위해, 공동체는 기억을 선택해야 한다. 신록을 닮은 학생들이 감미로운 봄바람에 마음 놓고 푸른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잠을 깨우는 달콤한 봄비에 머뭇거리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발산할 수 있도록, 공동체는 그날의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혜경 천상고등학교 교사

※외부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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