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수행은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진다. ‘행위의 윤리성을 향상시키는 수행’(계학, 戒學), ‘마음 지평을 향상시키는 수행’(정학, 定學), ‘이해 수준을 향상시키는 수행’(혜학, 慧學)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수행이 상호 간에 상승적으로 작용하면서 삶의 궁극적 향상(열반)을 누리게 된다. 이들 세 가지 가운데 근원적 지위에 놓이는 것은 ‘마음 수행’이다. 원효는 세 가지 수행에 관한 교학적 통찰을 모두 탐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특히 ‘마음’에 관한 탐구에 집중한다. 마음 탐구의 성과를 이해와 행위의 문제에 연결하는 것이 원효 사상의 특징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 속에서 발생·지속·변화·소멸한다. 생명현상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생명현상에서 목격되는 ‘조건들의 인과적 전개’ 과정에서 작동하는 ‘원초적 창발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원초적 창발력이 어떤 조건들에 의해 언제 발생하였는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인간 생명의 진화계열에서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또 인간의 진화가 거듭될수록 그 창발력의 수준과 내용도 역동적으로 고도화되고 있다. ‘언어능력과 그 고도화’ 및 그에 따른 ‘이해 능력’은 이 원초적 창발력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은 이 원초적 창발력의 작동 양상이다. 붓다가 성취한 깨달음도 ‘원초적 창발력으로서의 마음’과 ‘그에 의해 생겨난 이해 및 행위’의 상호관계를 활용한 것이다. 인간의 경험세계는 근원적으로 견해나 이해의 틀을 통해 직조되며, 견해와 이해는 마음이라는 창발력에 의해 형성되고 바뀐다. 마음은 견해와 이해를 만들고 관리하며, 견해와 이해는 다시 이 마음의 작동 양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음과 견해·이해는 모두 관계적 현상이며 역동적·동사적 사태이다. 원효는 무덤 속에서의 일을 계기로 이런 도리를 체득적으로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해나 마음을 뇌 속에 이미 장착된 ‘물리·화학적 정보처리 신경 시스템’의 산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이해와 마음의 변이적 가소성(可塑性)을 설명할 수가 없다. ‘생명현상에서 작동하는 원초적 창발력’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뇌 과학적 인간관의 내용과 전망이 달라진다. 마음에 관한 불교와 원효의 통찰은 이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원효는 마음에 관한 대승불교의 통찰에 매료되어 탐구했다. 대승불교의 교학은 크게 공(空) 교학과 유식(唯識) 교학을 두 축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공 교학은 ‘모든 현상에는 불변·독자의 실체나 본질이 없다’라는 이해를 수용해 가는 것을 수행의 토대로 삼고, 유식 교학은 ‘모든 현상은 마음에 의한 구성이다’라는 통찰에 의거하여 ‘마음 지평 바꾸기’를 수행의 토대로 삼는다. 공 교학은 이해 수행, 유식 교학은 마음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원효는 유식 교학의 마음에 관한 통찰을 토대로 공 교학을 융합하고 있다. 원효의 저술 목록이나 인용문을 보아도 마음에 관한 통찰을 담은 경론에 대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당나라 유학길에 나서기 이전에도, 원효는 마음의 철학에 관한 불교의 이론들을 섭렵하여 탐구했다. 그러나 아직 총명에 의한 사변적 이해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해 문턱을 넘어 체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마치 음식 먹고 체한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자신이 이해한 마음 이론에 대한 체득적 확신은 없었기에 유학까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국 직전에 그 답답함을 확 뚫어내는 드라마틱한 전기를 맞이하였다. 더 이상 밖으로 구할 필요가 없었기에 원효는 발길을 돌렸고, 의상은 원효와 헤어져 혼자 유학길에 오른다.
목록상 확인되는 원효의 저술은 80여부 200여권이 확인된다. 양과 질 모두 가히 동아시아 최대·최고의 저술가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 잔본(殘本)으로 남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총 20종의 저서만 현존한다. 전체 저술에 비해 극히 소량만 남아있는 현존 저술에서 인용되고 있는 경전과 논서들만 해도 100여종에 달한다. 그의 엄청난 독서량과 탐구열을 짐작하게 한다. 필자의 생각에, 원효의 본격적 저술 활동은 무덤 속의 깨달음 체득 이후의 일로 보인다. 그 체득으로 확보한 자신감은 탐구와 저술의 수준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을 것이다. 현존 저술의 대부분에서 목격되는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과 일관성 있는 수준이 이런 추정의 근거다. 일실(逸失)된 그의 방대한 저술을 만날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하도 아쉬워, 깊은 산속 어느 토굴 안에서 고스란히 간직된 그의 모든 저술을 발견하는 상상도 해 보곤 한다.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그림=권영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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