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상류 반고사서 사미승 생활한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실력있고 대중친화적, 비제도권 계열의 국내파 토착지성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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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상류 반고사서 사미승 생활한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실력있고 대중친화적, 비제도권 계열의 국내파 토착지성 대변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07.1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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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주 / 유화 / 세로 130.3 x 가로 162.2cm 권영태 작

고대 한반도 불교지성에는 상이한 두 계열이 목격된다. 국가적 비호를 누리며 ‘현재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지성 계열’과,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기존 질서에 불응하고 바꾸어 보려는 ‘변화 지향의 진보지성 계열’이 그것이다. 이 대조적 두 계열은 ‘제도권·유학파·귀족·지배층·이식(移植) 지성’과 ‘비제도권·국내파·평민·대중성·토착 지성’의 차이로 대비시킬 수도 있다. 전자는 왕도 경주를 무대로 삼아 국가 권력과의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왕조 국가의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는 제도권 주류 불교 진영이다. 후자는 제도권 불교의 권력 친연성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왕도와 거리를 두고 수평적 대중 친화성을 보여주는 비제도권 대중불교 진영이다.

6두품(혹은 5두품, 원효의 조부는 6두품이고 부친은 5두품) 출신으로 국내파이며 제도권 승직(僧職)에 임명되지 않았고 왕성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으며 결혼하여 환속했었던 원효. 수직 위계적인 승단 질서와 세속 질서 그 어느 곳에도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행보를, 사상과 실천을 통해 자신 있게 보여준 원효. 그는 실력 있고 대중 친화적인 비제도권 계열의 국내파 토착 지성을 대변한다.

원효가 대변하는 비제도권 계열의 대중 친화적 토착 불교지성에 대한 민중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그 자부심은 중국에 대한 한반도 불교의 자부심으로 나타난다.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했다’(척반구중는 설화는 그 자부심을 담고 있다. ‘원효가 기장 장안사에서 수행하던 중, 중국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의 대들보가 무너지려는 것을 투시하고는 ‘해동원효 척반구중(海東元曉 擲盤救衆)’이라 쓴 소반을 던져 운제사 대웅전 앞 허공에서 맴돌게 하였고, 그를 본 승려들이 밖으로 나온 순간 대웅전이 무너져 대중들이 무사하였다. 이에 천 명의 운제사 승려가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그들이 원효의 가르침을 받고 수행하여 모두 성인이 된 곳이 바로 양산 천성산(千聖山)이다.> 이 설화와 유사한 내용이 원효 생애에 관한 최초의 기록(원효 사후 100여년)인 ‘고선사 서당화상비’에도 등장한다. “강의를 하다가 문득 물병을 찾아서 서쪽을 (향해 뿜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보니, 당나라의 성선사(聖善寺)가 (화재를) 당했구나.>라고 했다. (글자 마멸) 물을 부은 곳이 이로부터 못이 되었으니, 고선사의 대사가 있던 방 앞의 작은 못이 바로 이것이다.” ‘송고승전’의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元曉傳)’에서는 “혹은 쟁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고, 혹은 물을 뿜어 불을 끄며”라고 하여 척반구중 설화와 서당화상비의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척반구중 설화에서 ‘원효가 소반을 던져 중국 승려들을 구했다’라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구제 대상이 되는 중국 사찰명은 전승 설화에 따라 변이를 보여준다.

양산 천성산(千聖山) 명칭의 유래는 ‘원효 가르침으로 수행하여 천 명이 성인이 되었던 산’이라는 척반구중 설화에 있다. ‘삼국유사’에서 천성산의 명칭은 포천산(布川山)이다. ‘동문선’ 「묘엄존자탑명」이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천성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점에는 천성산이라는 명칭이 ‘깨달음을 완성한 산’이라는 뜻을 지닌 원적산(圓寂山)이라는 명칭과 함께 사용되어 척반구중 설화와 천성산 명칭의 결합이 정착하고 있다.

척반구중 설화를 전해 가면서 유포하여 마침내 천성산 척반구중 설화로 정착시킨 동력의 주체는 무엇일까? 포천산이라는 명칭을 원적산·천성산으로 바꿔 부르게 한 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간에서 구전되었을 이야기 전승이며, 그 전승의 내용은 ‘천성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원효의 교육 행위와 제자들의 수행 및 성취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유래를 원효와 연결시키고 있는 천성산 내 수많은 암자와 유적지 설화는, 이러한 구전 전승의 산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전승을 지속시킨 동력이었을 수도 있다. 원효와는 무관한 암자와 유적이 천성산 척반구중 설화의 정착을 매개로 원효 설화로 도배된 것이 아니라, 실제 원효의 교육 장소이자 제자들의 수행처였던 천성산 일대에 펴져 있던 구전 전승이, 천성산 척반구중 설화를 정착시키고 포천산이라는 명칭을 원적산·천성산으로 바꿔 부르게 한 동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중국을 겨냥한 한국불교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척반구중 설화는, 원효가 대변하는 비제도권 계열의 국내파 대중 친화적 토착 지성에 대한 민중의 자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신라의 시대적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무열왕과 문무왕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대 왕실은 당나라까지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시대로서 국가적 자신감이 팽배했을 시기이다. 동시에 더 이상 진골 귀족 중심의 국가 운영으로는 진정한 삼국의 통합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인식이 대두할 수밖에 없는 때였다. 대중이 환호하는 6두품(혹은 5두품) 출신 원효에 대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적극적 태도도 그 연장선에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종무열왕은 과부로 있던 자신의 딸 요석(문무왕의 누이)과 원효를 맺어주기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문무왕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지어 황룡사에서 강의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원효에 비판적이었던 진골 귀족 출신 중심의 제도권 교단 지배층들을 견제하고 있다.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골품제도의 폐쇄성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는 점도, 골품제도의 폐쇄성을 제거하려는 시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원효는 자신에 대한 무열왕과 문무왕의 각별한 우호감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보답하고 있다. 문무왕 2년(662)에 김유신이 보내온 소정방의 암호를 해독해 주어 급히 회군케 하여 김유신과 군사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그 사례로 볼 수 있다. 무열왕과 문무왕은 김유신과 특별한 혼사로 맺어진 관계다. 김유신의 누이는 무열왕의 부인(문무왕의 모친인 문명황후)이고, 김유신 자신은 무열왕의 셋째 딸(요석공주의 자매인 지소부인)과 결혼한 사이이다.

가둘 수 없는 야생마, 사방에서 날아드는 올가미를 걷어차면서 달려가는 야생마. 민중은 삶의 올가미들에서 풀려나고픈 자신의 염원을 투영해 그에게 환호하였고 그를 마음속 깊이 품었다. “(그의 삶은) 진실로 (중생과) 공감할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에 (중생들에) 응하는 이치가 반드시 있었다.… (원효가 입적하고) 채 며칠 지나지도 않아 말 탄 무리가 떼를 지어 몰려와 유골을 가져가려 하였다.…끝내 왕궁을 멀리하며 토굴 생활을 끊지 않고 걸으면서 도를 즐겼다. (마멸) 자취와 글을 남겨 모두 큰 은혜를 입었다. 대사가 (마멸)을 당하니, (마멸) 울음을 머금었고 (마멸)월에 (마멸) 매번 (마멸)이 되면 모여들어 펼쳐 읽으며…(마멸)을 새겼다.”(서당화상비)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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