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행복’은 없어, 극락의 행복은 지옥의 고통과 언제나 맞닿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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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행복’은 없어, 극락의 행복은 지옥의 고통과 언제나 맞닿아 있어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09.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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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괘릉의 솔 / 60.6 x 72.7cm / 유화 / 권영태 작

경험이라는 현상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행복하다’라는 경험은 ‘행복하지 않다’라는 경험이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그러한 경험’은 ‘그러하지 않은 경험들과의 대비 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모든 경험 내용은 ‘관계 속에서 변하는 조건들의 차이 대비’에서 발생한다. 행복이라 부르는 ‘좋은 경험’은, 불행·고통이라 부르는 ‘좋지 않은 경험’과의 대비적 관계를 한 범주 안에 품어야만 비로소 발생한다. ‘행복이 아닌 것들’을 모두 쫓아내고 삭제하면 행복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오직 행복’ ‘100% 순수한 행복’은 본래 없다. ‘100% 순수한 오직 행복’이라는 말은, 행복을 희구하는 염원의 표현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행복은 ‘행복 아닌 것들’과 동거하는 뜨락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극락의 즐거움은 사바세계 번뇌와 고통을 그 발생 조건으로 품고 있고, 천당의 행복은 지옥의 고통과 언제나 함께 맞닿아 있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다’라는 말은 이런 통찰을 품고 있다. 인간의 모든 이해와 사유 및 경험은, 긍정적 방식이건 부정적 방식이건, ‘차이들과의 대비 및 관계 구조’ 안에서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 세상의 구조는 호혜적(互惠的)이다. 우주의 구조 자체도 그러하다. 긍정과 부정 관계를 아우르면서 ‘서로 은혜를 주고받는 구조’. - 이것이 인생과 세계를 포괄하는 ‘관계의 호혜적 자비 구조’다. 긍정·부정이 다층적·다면적·상호적·역동적으로 펼쳐지는 ‘관계의 호혜적 자비 구조’. - 이 진실을 ‘사실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더 나은 이로움을 향해’ 긍정과 부정을 막힘없이 운용해 가는 노력. - 이것이 붓다와 원효가 말하는 ‘지혜와 자비를 결합하는 수행’이다.

경험은 ‘다른 차이들을 조건으로 삼아 발생하는 현상’이다. 인간의 경험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다른 것들을 조건으로 삼아 생성·유지·변화·소멸한다. 그리고 현상을 발생시키는 모든 조건은 관계 속에서 변한다. 따라서 절대·독자·불변의 존재나 현상은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조건적 발생’(연기 緣起)은 우주적 이법이다. 문제는 인간의 시선이다. 중생 인간은 세계를 관통하는 이 연기의 도리에 반(反)하는 관점을 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동일성 관념’이 그것이다. 인간이나 물질에서 목격되는 특징이나 차이는 모두 ‘불변의 독자적 동일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 이것이 중생 인간의 ‘동일성 관념’이다. 혈통·성별·인종·민족·문화 등의 차이는 ‘독자적이고 변치 않는 동일 본질의 표현’이라는 것이 중생 인간의 시선이다.

인간 개개인은 ‘다양한 다름’과 ‘그 다름의 역동적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인간계를 비롯한 모든 세상에 ‘똑같음’과 ‘변치 않음’은 없다. 만약 세상이 온통 변치 않는 똑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세계는 ‘차이들의 역동적 관계 맺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차이가 없는 세계라면 그 어떤 현상도 생성·소멸하지 않으며, 만약 변화가 없다면 그 어떤 차이들도 서로 관계 맺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는 차이들에 대한 좋음과 싫음, 긍정과 부정이 불가피하다. 그래야 관계 속에서 생존한다. 차이들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차등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중생 인간은 이 차등 질서 속에 배열된 특징과 차이들을 ‘동일성 관념’으로 왜곡한다. 그들에게 차이들의 관계란 ‘독자적이고 변치 않는 동일성을 지닌 차이들의 관계’다. ‘독자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불변 차이’(이것을 ‘본질’ 혹은 ‘실체’라 부른다)는, 다른 차이들을 자기 공간에서 밀어내거나 소유 혹은 지배해야 한다. 독점적 소유와 강압적 지배가 필연적이다. 인간 특유의 ‘차별 체계’는 이렇게 발생한다. 차별 체계에서 차이들의 관계는 ‘배타적 우열의 체계’가 된다. 세계 본연의 ‘관계의 호혜적 자비 구조’는 ‘배제와 독점의 폭력 구조’로 둔갑한다.

원효는 경험 및 존재 발생의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세상을 재건하려 한다. 중생 인간이 건립한 ‘배제와 독점의 폭력적 차별 체계’를 ‘열린 관계의 호혜적 자비 체계’로 바꾸려고 한다. 이 근원적 기획을 현실에 구현하려면 ‘차이를 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원효가 즐겨 구사하는 ‘통섭(通攝)’이라는 말에는 그런 기획이 담겨 있다. 원효의 통섭(通攝)은, 서로 다른 것들을 한 체계로 묶으려는 통섭(統攝)이 아니다. ‘특징적 차이를 혼자만 차지하는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타자들을 밀어내고 정복하여 ‘차이의 우월적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중생 인간이다. 이 중생의 몸부림은 경험 및 존재 발생의 ‘사실 그대로’를 외면하고 왜곡한다. 이에 비해 차이의 주체들이, 삶과 세상의 ‘관계의 호혜적 자비 구조’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여, 서로를 향해 열고(通) 서로를 받아들이려는 것(攝). - 이것이 원효가 구현하려는 통섭(通攝)의 세상이다.

이 열림(通)과 받아들임(攝)은 1회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지는 역동적 사태다. 자신의 특징적 차이들도 자기 통섭의 대상이다. 자신이 드러내는 다수·변화·관계의 차이 현상들을 ‘서로 열고’(通) ‘서로 받아들이게’(攝) 할 때,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향해 던지는 차별적 시선’이 치유된다. 자기에게서 확인되는 다양한 차이들을 향한 차별적 강박 관념과 억압적 자기 검열이 비로소 풀린다.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자기 자신 및 세상의 차이들과 화해하고 통하는 길, 성찰과 실천을 통해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어 ‘관계의 호혜적 자비 구조’에 부합하는 삶과 세상을 구현해 가는 길, 비록 평가의 차등 체계 안에 배열되어 있지만 차이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서로 품고자 노력하는 길. - 원효는 이 ‘통섭(通攝)의 길을 걷는 보살 인간’의 행보를 권한다.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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