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현상을 물리·화학적 조건들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유물론적 결정론은 ‘인간 의지에 따른 선택의 자율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지에 따른 선택이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런 선택을 하게 하는 물리·화학적 조건이 선행하므로 자율적 선택의 공간은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붓다, 그리고 붓다의 길을 따라 걸어간 원효는, 정신과 물질의 상호적 인과관계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내밀하고 그 방식도 중층적으로 엮여 있다는 점을 직시한다. 또 선행하는 ‘정신·물질의 인과관계’가 현재를 좌우할 정도의 압도적 위력을 지녔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정신과 물질 현상의 상호적 인과관계에 개입하고 있는 ‘근원적 창발성’도 놓치지 않는다. 이 근원적 창발성으로 인해 의지나 의도에 따른 ‘선택의 열린 공간’이 확보된다. 선행하는 인과관계의 강력한 힘 앞에 얼핏 무력해 보일지라도, 인간은 언제나 선택의 열린 공간을 마주한다.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다.
불교 전통에서는 인간 존재에서 작동하는 이 근원적 창발성을 ‘마음’이라 부른다. 원효는 마음에 관한 붓다와 불교의 통찰을 묶어 일심(一心) 사상을 펼친다. 필자는 원효가 구사하는 일심(一心)이라는 용어를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이라 번역하고 있다. 일심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문장들의 의미 맥락, 마음은 ‘다른 조건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발생하는 역동적 현상’이라는 점을 고려한 번역이다.
일심은 자기동일성을 독자적으로 유지하는 불변의 명사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는 전능의 근원적 일자(一者)도 아니며,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는 ‘불생불멸의 궁극실재’도 아니다. 그런 이해는 원효의 의중과 무관한 것일 뿐 아니라 우주의 이법에도 맞지 않는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와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예외 없이 ‘변화와 관계’라는 이법에 포섭되어 있다. 독자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우주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우주 세계에 참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부단히 움직이며 타자와 관계 맺어야 한다. 생명체가 자기를 유지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먹고 숨 쉬는 일은, 음식과 공기 같은 ‘자기 아닌 것들’과의 관계를 부단히 맺어가는 움직임이다. ‘개체’라고 부르는 존재 역시 ‘변하는 조건들의 응집된 인과관계’에서 발생하는 ‘잠정적이고 역동적인 유사성’이다. 우주 세계 그 어느 곳에도 ‘불변·독자의 자기동일성을 간직하는 개체’는 없다. 일심도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이다.
생명의 진화 과정에는 ‘원초적이고 역동적인 창발력’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창발력은 인간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는 마음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음은 인간 특유의 언어능력을 창발시켰으며, 그에 수반하여 ‘이해 능력’을 발현시키고 지속적으로 고도화시켰다. 또 언어능력과 이해의 고도화에 상응하여 마음의 작용 내용과 양상도 역동적으로 변해왔다. 마음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일체를 지어내는 궁극실재나 창조자’가 아니다. 생명의 역동적인 원초적 창발력은 ‘마음·언어·이해의 상호연관 체계’를 형성하였다. 이 체계 역시 관계 속에서 변하는 역동적 현상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적 경험은 이 체계를 통해 발생한다. ‘마음’은 언어와 이해를 수립하여 유지·강화하거나 수정·대체하며, ‘언어와 이해’는 마음의 작용 내용에 개입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은 역동적이다.
인간의 모든 인식적 경험에는 속속들이 언어와 이해가 개입한다. 언어와 이해의 그물을 통과한 것들만이 인간의 인식적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와 이해의 수립과 운용에는 마음이 개입한다. 원효가 ‘모든 세계와 현상이 결국 마음의 구성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인식적 경험에는 언어와 이해가 개입하며, 그 언어와 이해는 마음에 의해 수립되고 관리된다’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마음이 수립하는 언어와 이해의 체계는 크게 두 계열로 구분된다. 하나는, ‘언어에 해당하는 불변·독자의 것이 있다’라고 이해하는 ‘동일성 관념의 계열’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가 지시하는 것은 ‘관계 속에서 변하는 조건들의 역동적 사태다’라고 이해하는 ‘연기(緣起) 성찰의 계열’이다.
‘동일성 관념의 계열’은 중생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무지의 계열이다. 이 계열에서는 삶과 죽음을 비롯한 온갖 차이(相)들을 ‘불변·독자의 것’으로 간주하여 상호 배제적으로 소유하고 차별하는 ‘무지의 기만과 폭력’ 및 그로 인한 고통이 난무한다.
‘연기 성찰의 계열’에서는 ‘차이들의 사실 그대로’에 의거하는 좋은 이로움이 삶과 세상을 두루 채워간다.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건강과 병약, 성·혈통·신체 같은 자연적 차이는 물론, 계층·직업 등 온갖 인위적 차이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당당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는 길이 활짝 열린다. 차이들 사이에 설치된 독점과 배제의 성벽이 무너져 내린다. 개인에게는 ‘통하여 만나는 자애와 평온’이 탁 트인 허공처럼 한꺼번(頓)에 열리고,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성찰의 힘’이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사회에서는 ‘차이들이 호혜적으로 어울리는 통섭(通攝)과 화쟁(和諍)의 축제’가 이곳저곳에서 펼쳐진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이 두 계열에 관한 통찰이다. 마음은 불변·독자의 존재가 아니기에, 두 계열 모두에 걸림 없이 넘나들 수 있다. 두 계열의 어떤 현상에도 열려 있고 어떤 현상과도 관계 맺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이다. ‘언어·이해의 동일성 관념 계열’에서 풀려나 ‘언어·이해의 연기 성찰 계열’을 펼치면서 언어와 이해를 이롭게 굴리는 인간.-‘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의 주인공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一心二門)을 이런 통찰로 풀어낸다.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은 ‘두 계열’(二門)의 수립이 모두 가능하고, 수립한 두 계열 모두에 통한다. ‘차이들의 사실 그대로를 왜곡시키는 인과관계 체계를 펼쳐가는 마음 계열’(심생멸문 心生滅門)과 ‘차이들의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인과관계 체계를 펼쳐가는 마음 계열’(심진여문 心眞如門)이 그 두 계열이다. 이 두 계열은 각각 ‘언어·이해의 동일성 관념 계열’과 ‘언어·이해의 연기 성찰 계열’이기도 하다. 이 ‘마음의 두 계열’(二門)은 상호 배제적인 것이 아니며(不二),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다(不一). 서로 상대를 품지만, 같지도 않은 관계다.
‘차이들의 사실 그대로’(진여상 眞如相)에 상응하여 온갖 이로움을 발현시키는 심진여문. -그것은 언제나 심생멸문에 기대어 있다. 행복과 고통이 함께 기대어 있으면서 서로를 이루어주는 것과 같다. ‘심진여문의 진리다움’은 심생멸문에 기대어 드러나고, ‘심진여문의 풍요로움’은 심생멸문에 기대어 구현된다. 원효가 굴리는 ‘일심의 인간학’이 일러주는 소식이다. 이 소식이 울려 퍼지는 길에서는 ‘동일함의 기만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다름의 호혜적 어울림’이 피어난다. ‘차이들의 서로 열림과 받아들임’(통섭 通攝), ‘배타적 다툼의 호혜적 화해’(화쟁 和諍)는 그 길에서 번져 가는 진리의 향기다.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
※9회에 걸친 연재를 마친다. 일종의 원효 문화전(文畵展)을 기획한 경상일보, 이에 멋진 작품으로 응해 주신 권영태 화백, 그리고 한국 전통철학의 면모와 전망에 높은 관심으로 호응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