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기로운 인재 꺾은 권력의 비정함
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腥塵)이 잠겨세라
언제나 남북 풍진을 헤쳐볼까 하노라 <청구영언>

오늘 아침 무심히 뿌리 내린 보춘화가 이렇게 곱게 꽃을 피웁니다. 긴 칼날 같은 난잎이 뻗은 가운데 난꽃이 오롯이 피었습니다.
사토(砂土)에 뿌리 내린 보춘화, 창가에 밀쳐져 있던 난 분에서 치맛자락 펄럭일 때마다 향기는 집안으로 번집니다. 치맛바람에 난향으로 상큼 미소를 짓는 아침입니다. 게으른 안주인이 못 본 체 겨울을 넘으며 물도 자주 주지 않았는데 보란 듯이 꽃을 피웠습니다. 가까운 산 아래 낙엽 쌓인 숲에서는 3월에 피던 것을 집 안에 들여놓았더니 무심한 주인을 향기로 깨웁니다. 얼굴 갖다 대면 볼 붉은 처녀 같은 꽃이랍니다. 공손히 허공을 떠올려 받치는 수줍은 보춘화의 자태를 사람들은 탐하나 봅니다.
칼날 같은 긴 난잎을 닦으며 남이(南怡) 장군의 장검을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남이 장군은 태종임금의 외손자이며 세조 때 정승 권람의 사위였습니다. 17세에 무과 급제하고 26세에 병조판서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위 시조는 여진과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고자 하는 기백과 포부를 노래하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필화(筆禍)를 맞은 한시(漢詩) 한 수가 있습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未平國)/ 뒷날 누가 대장부라 불러주리오.
이 시의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꿔 쳐 역모라고 이름 지어 멸문의 화(禍)를 당한 필화를 입은 장군입니다. 국운을 크게 열어 갈 젊고 패기 찬 인재를 잃은 조선의 역사입니다. 권력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정한 음모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그저 땅심의 기운을 받고 땅의 따뜻한 불기운을 안으며 아무 말도 더 보탤 수 없는 오늘의 현실에서 숨겨 지니던 날개를 퍼득여 창공으로 솟아오르는 시늉이나 하고 지내렵니다. 보춘화 향기를 함께 누리지요.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