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도종환 ‘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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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도종환 ‘이월’
  • 경상일보
  • 승인 2025.02.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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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나갔다는 걸 나무들은 몸으로 안다
한문을 배웠을 리 없는 산수유나무 어린 것들이
솟을대문 옆에서 입춘을 읽는다
이월이 좋은 것은
기다림이 나뭇가지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동쪽에는 허벅지까지 습설(濕雪)이 내려 쌓여
오르고 내리는 길 모두가 막혔다는데
길가의 나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삼월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월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
녹았던 물을 다시 살얼음으로 바꾸는 밤바람이
위세를 부리며 몰려다니지만
이월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그때마다 볼이 빨갛게 언 나를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월이 슬그머니 옆에 와 내가
바라보는 들판의 푸릇푸릇한 흔적을 함께 보고 있다



맹렬한 추위 끝나고 곧 만날 봄을 기다리며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 터진다더니 입춘대길이란 말이 무색하게 추위가 맹렬하다. 윗지방엔 폭설까지 내렸다니 겨울의 심술은 뒤끝이 있다.

하지만 한겨울과 늦겨울의 추위는 다르다. 소한 무렵 추위가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라면 입춘 무렵은 살갗을 건드리는 추위다. 무언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이 추위에 고로쇠 수액 판매글이 올라오고 있으니 나무는 이미 저 뿌리 끝에서 봄을 준비하고 있나 보다. 정말, 봄은 식물이 먼저 알아차린다. 보라색 입술처럼 파들거리며 땅을 움켜쥐고 있던 뽀리뱅이 로제트가 살짝 잎끝을 들어 올린다. 냇가의 버들강아지는 몽실몽실 은빛 몸을 부풀리고 버드나무 머리채엔 연둣빛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시인이 이월에서 느끼는 정조 가운데 하나는 ‘가벼움’이다. 아직 물기 머금은 습설이 내리고 물에는 살얼음이 끼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곧 봄이 올 테니까. 이미 와 버린 게 아니라 오고 있는 봄. 어린 시절 동구 밖에서 우체부를 기다리는 설렘 같은 것. 가만히 바라보면 들판 끝이 몽롱해 보이는 이월. 희망은 실현이 아니라 기대이다. 그래서 가볍다. 칸트는 이월은 짧아서 고통도 짧은 달이라고 하였다. 이월이 주는 크나큰 위안이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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