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보는 지난해 3월부터 11월까지 9개월간 연재해 독자들의 호응을 얻었던 ‘태화강 상류 반고사서 사미승 생활한 원효의 발자취를 찾아’에 이어 올해도 ‘원효 문화전(文畵展)’이라는 이름으로 원효 관련 기획물을 매월 한 차례 씩 연재합니다. 박태원 인제대학교 석좌교수의 글에 권영태 화백의 작품으로 신라의 고승인 원효(元曉 617~686)를 거울 삼아 우리가 걷는 길과 걸어야 하는 길을 비춰보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인간은 현상의 특징·차이들을 언어에 담아 다루는 언어인간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과 존재는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에 담겨 분류된 것’이다. 언어인간이 된 이후, 인간의 모든 경험은 어떤 방식과 정도일지라도 언어에 연루돼 있다. 인간이 언어능력을 발현시킨 것은, 차이들로 채워진 환경에 잘 적응해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생명력의 선택이었다. 차이·특징에 대한 정교한 언어적 분류를 통해 비교·판단·평가·기억하는 능력이 발달했고, 분석·추론을 통해 현상들의 법칙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가장 성능 좋은 문제 해결력을 확보했다. 차이를 기호로 처리해 문제를 해결하는 언어능력은 급기야 인공지능(AI)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인공지능 시대는 언어인간 진화의 마지막 단계일까? 기술문명의 시선은 그런 전망에 들떠 있다. 그러나 인문의 시선은 다르다. 인공지능은 새로운 차원으로의 언어능력 진화가 아니라, 언어능력을 발현시킨 이후 지속시켜 온 기능적 고도화의 한 단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능적 고도화의 모든 과정을 관통하고 있는 ‘언어 관념’은 여전히 진화를 거부하고 있다.
‘언어 관념’은 ‘언어에 수반해 발생하는 관념’인데, ‘사물과 세계를 보는 창(窓)’이다. 인간은 차이들을 분류하는 언어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만난다. 그런데 언어라는 창은 ‘규격이 일정하게 정해진 구조물’이 아니다. 규격이 정해진 창이라면, 그 창을 통해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일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언어의 창은 ‘언어를 통해 발생한 관념’으로 짜인 주관적 구조물이다. 관념의 내용에 따라 창의 규격과 유리창의 색깔이 달라지는 가변적 구조물이다.
‘언어에서 발생한 관념으로 짜인 창’으로 보는 세상은, 관념이 지닌 관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그리고 인공지능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언어의 창’을 건립해 온 ‘언어 관념’은, 그것을 지배하는 관점이 뚜렷하다. ‘동일한 것이다’라고 보는 관점, 즉 동일성 관념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언어능력의 새로운 차원에로의 진화가 아니라, 동일성 관념의 기능적 업그레이드일 뿐이다.
동일성 관념이란 ‘언어에 해당하는 내용을 동일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관점 및 이해’를 지칭한다. ‘언어는 동일성·독자성·불변성을 지닌 단일 존재를 지시한다’라고 보는 관념이다. 이 동일성 관념은 언어를 통한 문제 해결력을 높이기 위해 요청한 허구다. 동일·독자·불변의 단수적 존재는 원래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 구분해 지칭하는 ‘차이’는 ‘섞임·관계·변화의 복수적 사태’다. 그것이 ‘차이의 사실 그대로’다.
언어에는 이처럼 ‘요청된 허구’와 ‘사실 그대로’라는 양면적 사태가 얽혀 있다. 중생 인간은 언어의 양면적 사태 가운데 허구적 요청을 선택했다. 그 후 언어인간의 관점과 이해를 수립하는 토대는 ‘동일성 관념’이 되었다. 언어인간이 된 이후 현재까지 ‘언어의 창’은 ‘동일성 관념의 창’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언어인간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인해 건립한 동일성 관념’의 압도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언어인간은 아직 언어 허구의 노예다. 언어능력의 궁극 진화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동일성 관념은 모든 현상과 존재의 ‘사실 그대로’를 왜곡시킨다. ‘동일·불변의 단일 자아’라는 관념은 대표적 왜곡이다. 중생 언어인간은 언어 호칭에 해당하는 ‘불변의 동일한 것’이 있다고 여긴다. ‘갑순이’라는 호칭에는 갑순이만의 정신이나 인격, 개성 등이 변치 않는 내용으로 간직되어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갑순이’라는 호칭 안에는 동일한 내용, 변하지 않는 내용, 독자적인 내용이 그 어디에도 없다. 확인되는 것이라고는 오직 ‘다수·변화·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인과관계의 잠정적 응집 양상’이다. 일정 기간 유지되는 인과관계의 응집적 특징·차이를 ‘개인’ ‘인격’ ‘정체성’ ‘개체’ 등으로 호칭하면서 다른 특징·차이와 구분할 뿐이다. 언어 명칭이 불변의 단일 자아를 지시한다는 생각은 ‘언어에서 비롯된 동일성 관념이 빚어낸 존재 환각’이다. 이 자아 환각은 인간 특유의 배타적 폭력성(분노), 증폭적 소유욕(탐욕), 정교한 합리화(무지)의 원동력이 돼 삶과 세상을 할퀸다.
붓다는 언어인간의 자아 관념이 언어에서 비롯된 환각적 허구라는 점을 폭로하면서 새로운 언어인간의 탄생을 선언한다. “도반들이여, 마치 목재와 덩굴과 진흙과 짚으로 허공을 덮어서 ‘집’이란 명칭이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뼈와 신경과 살과 피부로 허공을 덮어서 ‘몸’(色)이라는 명칭이 생깁니다.”(‘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자취에 비유한 큰 경’) “찟따여, 이런 자아의 획득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디가 니까야’ ‘뽓타빠다 경’)
‘언어의 지시 내용을 불변의 동일성으로 채우지 말라. 불변의 동일성은 ‘사실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어를 배제하지도 말라. 동일성 관념의 옷을 입히지 말고, 단지 ‘차이들의 구분과 문제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만 사용해라. 언어가 없으면 ‘사실 그대로’를 성찰할 수도 없고, ‘사실 그대로에 상응하는 이로움’을 성취할 수도 없다. 언어를 ‘재앙의 문’이 아니라 ‘만복의 문’으로 바꿔라.’ -언어능력 길에 세워놓은 궁극 진화의 안내판이다. 언어인간이 동일성 관념에 매이는 한, 지식의 검색·분류·편집 및 재구성 기능을 획기적으로 고도화시키는 인공지능(AI)은 자칫 지식을 지배해 온 동일성 환각의 재앙을 극대화하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동일성 관념을 극복한 언어능력을 확보해야 언어인간의 궁극 진화가 이루어진다. 동일성 관념에서 풀려난 ‘새로운 언어능력’이 인간의 일상을 주도할 수 있을 때, 인공지능은 언어인간의 궁극 진화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원효는 이 새로운 언어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어에 의지해 ‘언어 환각이 사라진 도리’(絶言之法)를 드러내니, 마치 손가락에 의지해 손가락을 떠난 달을 내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보살이 만약 망상의 분별을 여의어 ‘두루 헤아려 집착하는 양상’(遍計所執相)을 없애버리면, 곧 ‘언어 환각에서 벗어난 도리’(離言之法)를 드러내 비출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모든 현상의 ‘언어 환각에서 벗어난 양상’’(諸法離言相)이 나타난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글=박태원 인제대 석좌교수(화쟁인문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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